고갱

고갱 (1848-1903)

고갱의 종합주의 표현

고갱은 인상주의로 출발한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기법 면에서는 지극히 반인상주의적이다. ‘종합주의’로 불리는 그의 회화 기법은 1886년을 기점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순간의 인상을 그리기 위해 색채를 작게 분할하는 색채분할법을 사용했지만, 고갱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는 물체의 본질을 표현하지 못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색채분할법 대신 색면을 넓게 채색하는 표현 방법인 종합주의를 탄생시킨 것이다. 고갱의 종합주의는 색면을 평면적으로 채색함과 동시에 선으로 형태를 단순화시키는 것에 있다. 평면적인 색채를 칠한 후 그는 짙은 윤곽선으로 형태를 감쌌다. 이로써 형태가 더욱 뚜렷해지고 단순화된다. 고갱의 작품은 간결하고 뚜렷한 형태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고갱이 종합주의 표현법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대상을 보다 정확하게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이 같은 표현방법은 중세 교회를 장식하고 있던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색과 형태의 단순화를 꾀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고갱은 이 단순화를 통해 주제의 내적인 의미를 더욱 강조하고, 그 영감을 캔버스 위로 끌어올리고자 했다.

후기인상파의 방랑자 : 비자연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의 출현에 초석

종합주의를 고려하며 그리다 : 영혼을 일깨우는 이미지를 색채나 선의 배치를 통해 표현. 상징주의적인 신비한 요소. 관념. 사상 구현. 2차원의 평면을 강조

단순한 색채와 형태 : 인간 존재의 근본에 가까운 원시적인 광경을 단순화된 구도와 색채 표현. 순색의 넓은 색면 기법을 개발하여 야수주의로의 길을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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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페네커의 아틀리에, 1889년, 캔버스에 유채, 73.5 x 92cm
<슈페네커 가족>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 작품에서 고갱은 친구이자 화가였던 에밀 슈페네커의 아틀리에와 가족을 그리고 있다. 슈페네커 역시 고갱과 마찬가지로 증권 거래소를 그만 두고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며 그림을 그렸다. 1888년 12월 고갱은 반 고흐와 함께 지낸 두 달간의 아를르 생활을 정리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고갱은 파리에 돌아와 친구 에밀 슈페네커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그 무렵에 그려진 것이다.
고갱은 캔버스가 자리한 화가의 아틀리에를 배경으로 하여 슈페네커의 부인과 두 딸을 화폭에 담았다. 고갱은 노란 색 바닥과 푸른 색 벽면, 두 딸의 옷에서 사실적인 색상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이 담겨진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였다. 이 작품에서 고갱이 선택한 생생한 색채들은 그가 남프랑스 아를르에서 탐구했던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화가 앞에 놓여진 이젤, 그리고 화면 오른쪽 벽에 붙여진 그림들을 통해 이 곳이 아틀리에임을 알려준다.

 

 

황색의 그리스도 1889 캔버스 유채 93×73cm 뉴욕 엘브라이트 녹스 이아트 갤러리
1880년대 후반부터 고갱은 자신의 작품에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굵은 윤곽선으로 정리하는 의미의 ‘종합’이라는 말을 부여했다. 빛의 흐름에 따라 형태가 불명확했던 인상주의 화가들과 달리 갖하는 의미의 ‘종합’이라는 말을 부여했다. 빛의 흐름에 따라 형태가 불명확했던 인상주의 화가들과 달리 고갱은 대상 하나 하나를 명확한 존재로 표현하고자 했다.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1890∼91년, 캔버스에 유채, 38 x 46cm
고갱은 1889년 <황색 그리스도>라는 작품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경건하게 그려야 할 그리스도가 마치 브르타뉴의 농부처럼 그려졌다는 이유였다. 이후 고갱은 자신의 자화상에 <황색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그려 넣었는데, 좌우가 바뀐 것으로 미루어보아 거울에 비친 <황색 그리스도>를 그린 것이다.

 

 

 

모자쓴자화상1893∼94년, 캔버스에 유채, 46 x 93cm
1895년 고갱이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타히티로 떠나기 1년여 전 그린 작품으로, 프랑스에서 그린 최후의 자화상으로 남아 있다.
이 작품 역시 고갱의 다른 자화상처럼 3/4 정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앞서 그려진 세 점의 자화상 – <후광이 있는 자화상>(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오르세 미술관 소장), <팔레트를 든 자화상>(파시데나 미술관 소장) -보다 훨씬 어두운 색조로 그려진 이 작품에는 당시 고갱의 힘겨웠던 삶이 깔려 있다.
1893년 코펜하겐의 친정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기거하고 있던 고갱의 부인, 메테는 파리로 돌아와 다시 함께 생활하자는 고갱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외로워하던 고갱은 다시 안나라는 여인과 동거하였으나, 1894년 그녀마저 그의 집을 털어 달아났다. 게다가 다리의 부상으로 육체적인 고통까지 겪었던 고갱은 결국 파리 생활에 염증을 느껴 다시 타히티로 돌아가게 된다.
<황색의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자신의 그림을 배경 속에 집어넣었다. 자화상 뒤로 보이는 그림은 1892년에 그려진 <마나오 투파파우>로서,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그려졌다.

타히티 여인들, 해변에서 1891년, 캔버스에 유채, 69 x 91.5cm
이미 브르타뉴 지방에서 원시성과 야만성을 발견한 고갱은 마침내 1891년 그토록 동경하던 원시적인 삶을 찾아 타히티로 떠났다. 그에게 타히티는 원시적인 종교성, 그 끝없는 탐구에 대한 최후의 답안으로 여겨졌다. 고갱은 타히티에서 나른한 여인들의 자태, 우수에 찬 시선 등에 매료되었다. <타히티 여인들>, 혹은 <해변에서>로 알려진 이 작품은 해변가에 앉아 있는 두 여인의 모습을 아주 가깝게 묘사하였는데, 대담한 구도와 과감한 색채가 돋보인다.

마리아를 경배하며 1891 캔버스 유채 113.7×87.6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우리는어디서 왔는가? 우리는누구인가?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1897 보스턴 미술관
가장 아끼던 딸이 스무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병사하고, 자기 자신도 매독과 안질로 고생했지만 빚 때문에 치료비마저 댈 수 없게 되자, 고갱은 인생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자살을 결심한다. 이 작품은 절망에 빠진  그가 마지막 작품으로 생각하고 시작한 것이다. 사함이 태어나고, 살고, 죽는 과정을 철학적이고 우의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을 두루마리식 대작으로 마무리 지었을 때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작품을 완성한 후 비소를 먹어 자실을 꾀했지만 결구 실패하고, 그 후 6년을 더 살았다.
습작 데생을 거치지 않고 고갱은 직접 캔버스에 작업을 했지만, 이는 고갱의 오랜 사색과 집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오른 쪽에 그려진 노인과 여인, 아이들을 통해 그는 인생의 단면을 보여준다. 가운데에 위치해 열매를 따려고 하는 중앙의 남자를 통해서는 존재의 의미를 묻고 있다

아레아레아, 기쁨> 1892년, 캔버스에 유채, 75 x 94cm
이 작품은 고갱이 처음으로 타히티에 체류하는 동안 그린 세 점의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타히티의 신화를 통해 고갱은 보는 사람의 상상력이 흡사 음악처럼 작용할 수 있는 장식적인 미술을 창조하고자 했다. 그림의 중앙에 그려진 땅은 공간을 따뜻한 색상으로 채우면서 서정적인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이는 실재하는 모양과 색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그려진 것이다
고갱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색이나 선으로 똑같이 표현하려 하지 않고, 그 선과 색의 배열 사이에 있는 신비한 친화력을 드러내고자 했다. 왼쪽 위에 부드럽고 연한 색을 발라 표현한 신상은 달의 여신 히나를 그린 것이고, 중앙에 위치한 인물이 연주하고 있는 피리는 타히티에 머물면서 고갱이 느꼈던 밤의 고요함을 표현한 것이다. 부자연스럽게 자리한 왼쪽의 붉은 개는 고갱이 의도적으로 묘사한 것이며, 다른 많은 작품에도 등장하고 있다. 의미가 불분명한 이 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표했고, 한 비평가는 이 개를 악의 요정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고갱은 티치아노나 조르조네와 같은 거장들이 발전시켜 왔으며, 동시대의 화가들 역시 매달리고 있었던 유럽의 낭만적인 전원화 전통을 확대시키고 있다.

모성 1899 캔버스 유채 93×63cm 뉴욕 개인 소장

고갱이 선원으로 항해하던 중에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유난히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많았던 고갱은 그의 딸에게 어머니와 같은 이름을 붙일 정도로 딸을 사랑했으나, 1896년 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대담한 색의 배치와 구도로 고갱은 어머니의 사랑을 찬양하고 있다.

1895년 고갱이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타히티로 떠나기 1년여 전 그린 작품으로, 프랑스에서 그린 최후의 자화상으로 남아 있다.

이 작품 역시 고갱의 다른 자화상처럼 3/4 정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앞서 그려진 세 점의 자화상 – <후광이 있는 자화상>(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오르세 미술관 소장), <팔레트를 든 자화상>(파시데나 미술관 소장) -보다 훨씬 어두운 색조로 그려진 이 작품에는 당시 고갱의 힘겨웠던 삶이 깔려 있다.

1893년 코펜하겐의 친정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기거하고 있던 고갱의 부인, 메테는 파리로 돌아와 다시 함께 생활하자는 고갱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외로워하던 고갱은 다시 안나라는 여인과 동거하였으나, 1894년 그녀마저 그의 집을 털어 달아났다. 게다가 다리의 부상으로 육체적인 고통까지 겪었던 고갱은 결국 파리 생활에 염증을 느껴 다시 타히티로 돌아가게 된다.

<황색의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자신의 그림을 배경 속에 집어넣었다. 자화상 뒤로 보이는 그림은 1892년에 그려진 <마나오 투파파우>로서,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그려졌다.

부르타뉴의 여인들, 1894년, 캔버스에 유채, 66 x 92.5cm

1886년 7월 고갱은 문명에 대한 회의를 품고 파리를 떠나 프랑스 서부 부르타뉴 지방의 퐁 타방(Pont-Aven)에 체류한다. 페루의 리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갱은 줄곧 문명에 대하여 회의하였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이상향, 자연의 순수함을 찾아 퐁 타방으로 향한 것이다.

이 그림은 1894년에 그려진 작품으로 경제적 궁핍과 악화된 건강 등으로 고갱의 일생 중 가장 힘든 때 그려진 작품이다. 1891년 원시의 야만성을 찾아 타히티로 떠났던 고갱이 다시 브르타뉴를 찾았을 때, 그는 퐁 타방 근처의 여인숙에 맡겨 두었던 그림들도 되찾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위축된 상태에 있었다.

전면에 우뚝 서 있는 두 여인들은 부르타뉴 지방의 민속 의상을 입고 있긴 하지만, 황토색의 투박한 얼굴 생김새, 크고 검은 발의 모습 등이 오히려 타히티 여인에 가깝다. 오른쪽의 숲 역시 타히티의 열대림을 연상시킨다. 프랑스에 돌아와서도 타히티의 순수한 자연을 그리워했던 고갱의 안타까움, 타히티의 강렬한 영향력이 묻어난다.

식사, 1891년, 캔버스에 유채

장르화의 분위기와 정물화가 절묘하게 조화된 이 작품은 고갱이 타히티를 처음 방문하였던 1891년 그려진 것이다.

고갱은 이 작품에서 검소한 식탁 앞의 부동 자세의 아이들을 그렸다. 정밀하지만 단순한 구성으로 열대 원시림 속에서 찾고자 했던 원시적인 생활 방식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고갱이 타히티의 첫 방문 때 접했던 원주민들의 조용하고 엄숙한 생활 자세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견고한 대상의 입체감, 테두리의 분명한 윤곽선, 하얀 식탁보 등은 세잔느의 정물화를 연상시킨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식탁은 정물이 놓여 있는 식탁 전면, 그리고 인물들이 앉아 있는 뒤편 공간으로 공간을 단순하게 이분화하고 있다. <타히티 여인들>에서처럼 화면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이 공간을 구획 짓는 이러한 구도는 브르타뉴 시기부터 고갱이 즐겨 썼던 도식적인 구성이다.

백마, 1898년, 캔버스에 유채, 140 x 91.5cm

타히티에서 머물다 1893년 8월 프랑스로 간 고갱은 파리와 브르타유 지방을 오간다. 그 해 11월 뒤랑뤼엘 화랑에서 대양주 작품 전시회를 갖고, 1895년 9월 다시 타히티에 정착한다. 1897년 고갱이 가장 아끼던 딸 알린의 죽음은 그가 자살을 기도할 만큼 심신을 극도로 황폐하게 만들었고, 그 다음 해에 그려진 이 작품은 늪의 수면이나 나무의 검푸른 가지가 전체적으로 어둡고 침체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짙푸른 웅덩이와 그 물을 마시고 있는 하얀 말, 어두운 색조의 나뭇가지와 늪 가에 피어 있는 하얀 꽃, 무표정하게 말에 앉아 사라져 가는 섬의 여인 등은 이상한 구도와 침묵을 만들고 있다. 오랫동안 이해되지 못했던 이 작품은 고갱의 타히티에 관한 많은 그림들과 더불어 배경과 색채의 조화로 나타나는 효과가 최상의 결합을 이루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고갱의 독창적인 작품이면서도 고대의 전형적 양식인 파르테논 신전의 백마의 모습을 차용하고 있으며, 나무는 브르타뉴 시절의 그림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던 일본 판화가 안도 히로시게의 영향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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